로마의 일인자들(3)
로마의 일인자들(3)
  • 김도원(金途遠)
  • 승인 2019.05.0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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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여! 그대들의 꿈은 이루어졌소!

“82년 전 야니쿨룸 언덕(로마에서 티베리스 강 건너편 서북쪽에 위치한 언덕. 이 요새 꼭대기의 붉은 깃발이 내려지면 로마가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다는 신호였다.) 밑의 루키나 숲에서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느꼈던 감정이 이랬을까? 계획은 좌초되고, 추종자들은 죽고, 적들은 그의 피를 달라고 울부짖었다. 적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적들은 그의 머리를 자르고 그의 매장을 거부하여 만족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Masters of Rome , 카이사르 3, 기원전 4946일부터 기원전 48929일까지. 183p)

외할아버지는 한니발과의 2차 포에니 전투에서 로마를 구한 위대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Major, B.C236~B.C183)였다. 아버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the Elder)또한 유명한 장군이었다. 두 번이나 개선식을 올렸고, 로마 공화정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consul)을 두 번이나 지냈다. 평민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라쿠스 형제. 형의 이름은 티베리우스였고, -당시 로마의 관습에 따라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랐다.- 동생은 가이우스(Gaius Gracchus)였다. 형제는 9살 차이가 났다. 형제가 어릴 때 한 부인이 코르넬리아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보석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나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가난하다고 수군대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러자 코르넬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그런 보석은 하나도 없지만, 대신 다른 보석은 있지요. 여기 이 아이들이 저의 보석입니다.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지고 소중한 보석이지요.” 코르넬리아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였다.

그라쿠스 형제는 둘 다 호민관을 지냈고, 평민과 빈민을 위한 토지개혁법을 추진했다. 형제가 추진한 법은 국유지를 평민과 빈민에게 분배해 자영농을 육성하는 법으로 매우 급진적이었다. 당연히 두 형제가 추진한 법은, 는 자손 대대로 세습되어져야하고, 토지에 대한 권리는 귀족과 부자들에게 영원불멸해야 한다는 그들의 관습에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엉덩이를 걷어차인 귀족과 부자들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티베리우스가 왕이 되려한다고 모함했다. 결국 티베리우스는 법을 통과시키려던 투표장에서 같은 호민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사투레이우스가 내려치는 둔기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반대파들은 그의 시신을 모욕하고 티베르 강(테베레 강 Tevere River의 옛 이름.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강으로 로마 시내를 관통한다.)에 던졌다.

그라쿠스 형제. 소수의 지배층에게 부가 집중되었던 로마 말기의 경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토지개혁법을 추진했으나, 형 티베리우스는 암살당했고, 동생 가이우스는 자살했다. (사진 출처 네이버)
그라쿠스 형제. 소수의 지배층에게 부가 집중되었던 로마 말기의 경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토지개혁법을 추진했으나, 형 티베리우스는 암살당했고, 동생 가이우스는 자살했다. (사진 출처 네이버)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106~B.C43, 고대 로마의 정치가 겸 저술가)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는 원래 정치에 뜻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이 꿈속에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가이우스야! 왜 그러고 있느냐?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와 나는 똑같은 일생을 살아가도록 이미 정해져 있다.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란 말이다.” 이후 가이우스 크라쿠스는 정계에 입문했다. 호민관이 된 가이우스는 형의 뜻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이어받았다. 가이우스가 만든 법들은 시민들의 지지 속에서 통과되었다. 그의 정치력 또한 커졌다. 원로원은 가이우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 두려웠다. 가이우스가 카르타고를 재건하기 위해 로마를 떠나있는 동안, 정적들의 음모가 진행됐다. 가이우스의 인기는 하락했고, 로마로 돌아와 세 번째로 출마한 호민관 선거에서 그는 떨어졌다. 그해의 집정관 오피미우스(Lucius Opimius)와 정적들에 의해 그가 만든 법들은 모두 폐기되었고, 정적들과 그의 친구였던 풀비우스의 싸움 속에서 쫓기다 어느 숲 아래서 가이우스는 그의 하인 필라크로테스와 함께 자살했다. 그의 주검 또한 형 티베리우스처럼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이때 티베르 강에 던져진 가이우스와 풀비우스의 지지자들의 시체만도 3,000여 명에 달했다. 기원전 121년의 일이다. 60년 후 형제가 모든 것을 바쳐 추진했던 토지개혁법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100~44 BC)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다. 민중의 위대한 친구 그라쿠스 형제여! 그대들의 꿈은 이루어졌소!

계획은 좌초되고, 추종자들은 죽고, 적들은 그의 피를 달라고 울부짖었다. 적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적들은 그의 머리를 자르고 그의 매장을 거부하여 만족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에선가 우리는 이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미래의 어느 시간 우리는 이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또 무엇을 예언할 것인가? 역사학자 E.H.Carr(1892~1982)는 그의 불후不朽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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