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을 찾아서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을 찾아서
  • 이상명 기자
  • 승인 2019.11.0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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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길재단 이길여회장이 60년대 처음 개원한 산부인과 자리
1~3층 당시 모습 재현하며 '바람개비론'을 엿볼 수 있는 현장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불굴의 의지로 앞날을 개척하는 리더들이 있다. 미래 세대들은 그런 리더들을 보고 배우면서 자신의 꿈을 가꿔가게 된다.

우리나라의 산부인과 역사 역시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겸 가천대학교 총장이라는 걸출한 리더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1958년 인천에서 산부인과를 개원한 이래 수많은 새 생명들을 탄생시킨 것은 물론 쉬지않고 영역을 확장해 의료는 물론 교육, 언론,문화분야까지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온 이회장이기 때문이다.

이회장의 쉼없는 도전을 오롯이 재현해 이길여 산부인과를 거쳐간 많은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인천시민들에게 박애, 봉사, 애국의 정신을 알려주는 공간이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이다. 개원한 당시 병원건물의 1~3층을 활용해 당시의 산부인과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기념관을 둘러보면 60~70년대 이길여 산부인과의 내부뿐 아니라 이회장의 정신까지 헤아려볼 수 있다.

보증금없는 병원 현판이 붙어있는 기념관 정문과 전경 (사진=가천길재단 제공)
'보증금없는 병원' 현판이 붙어있는 기념관 정문과 전경 (사진=가천길재단 제공)

 

기념관 건물앞에 서면 '이길여 산부인과 의원'이라는 현판과 함께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의료보험이 도입되기전인 60~70년대 당시 병원들은 치료비를 떼일 것을 우려해 환자들에게 치료전에 보증금을 요구했다고 한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책값 술값 병원비는 떼어먹어도 된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다고 이회장은 한 글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예 보증금없는 병원이라는 팻말을 병원앞에 붙여놓고 사정이 어려운 환자들을 돌봤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환자들이 돈 대신에 쌀이나 생선 배추등을 대신 들고 찾아왔다고 해서 기념관 1층에 그런 '치료비 물건'을 전시해두고 있다. 1972년에 이 곳 산부인과에서 출생했다는 이순하씨는 "어머니가 '네가 태어났을때 이원장님이 병원비를 반값만 내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해주시곤 했는데 저희의 어려웠던 집안사정을 짐작해서 아이가 얌전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할인을 해주신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를 기념관에 들려서 해준 적이 있다고 신명호 홍보팀장은 설명했다. 그 시절을 소환한 듯 1층에는 쌀, 소금, 생선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에 병원비를 할인받거나 무료진료를 받았던 서민들이 치료비대신 병원으로 가져온 '마음의 치료비'였다는 것이다.

1층에 재현해둔 진찰실과 진료실에는 이회장이 사용했던 바퀴달린 의자와 청진기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이 의자는 환자가 많아 이원장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의자에 바퀴를 달아 굴려가면서 동시에 두세명의 환자를 동시에 돌보기 위한 소품이었다. 청진기도 금속이어서 환자들의 피부에 닿으면 놀랠 것을 우려해 이원장은 늘 가슴에 품고 체온으로 데워서 사용한 애장품이라고 한다. 

또한 70년대초 국내에 4대밖에 없는 태아심박 측정 초음파기기(당시 4천만원상당)와 자궁경부경 기기를 어려운 형편에도 고가의 이 장비들을 들여와 임산부들에게 직접 태아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려줘가면서 진료를 했다고 해서 인천 의료계의 명물로 알려졌는데 현재는 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60년대초 선구자답게 미국유학을 통해 첨단 의료술을 경험한 이회장의 앞서가는 자세가 조그만 산부인과에서 출발, 종합병원을 건립하고 의료인력 양성을 위해 의과대학과 종합대학을 인수하는 등 도전의 역사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지금은 당연한 건물내 시설물이지만 이 산부인과는 당시에 귀했던 엘리베이터도 설치해 몸이 무거운 임산부와 환자들을 배려했다고 하는데 동네 꼬마들이 들락거리며 이 신기한(?) 물건을 타고 놀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2층에는 수술실 분만대기실 입원실이 당시 모습 그대로 구현되어 있는데 이회장과 임산부 환자들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이회장은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고려해 늘 안고 체온을 확인하거나 편안하게 돌보는 가 하면 언니가 손수 끓인 미역국을 산모들에게 제공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런 이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전시되어있고 미역국이 담긴 솥단지도 볼 수 있다. 이회장은 늘 곁에서 자신을 도와준 언니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36개 병상을 차지한 산모들이 먹을 미역국은 언니가 준비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심지어 퇴원한 산모가 남편에게 냄비를 들려 보내기도 했다"고 자랑하면서 "언니는 든든한 바람막이이자 친구요, 남편이고, 그림자였다"고 술회했다.

3층으로 올라가면 이길여회장의 철학과 개척정신을 영상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영상실, 포토존, 아름다운 샘 공간이 자리한다.  기념관을 부인과 함께 관람한 바 있는 추연익씨는 1977년에 딸을 출산했다면서 "기념관이 딸이 태어났던 기쁨의 순간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만큼 새 생명을 얻었던 장소에 대한 소회는 누구에게나 깊은 법. 그래서 이 기념관은 지금도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3층에는 이회장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바람개비론을 압축한 글귀가 다가왔다. "바람개비는 거센 바람이 불면 더욱 힘차게 돌아갑니다"라고 적혀있는 이 글속에는 이회장의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크게 느껴졌다. 한 글에서 이 회장은 "시골 소녀가 돌리던 작은 바람개비가 거대한 풍차로 변해 가천길재단을 일구는 원동력이 됐다"고 술회한 바 있다.

조그만 산부인과에서 출발해 60년넘게 거대한 역사를 일궈온 이회장의 정신과 스토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가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은 이러한 정신을 되새기고자하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인천의 명물로 사랑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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