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일인자들(8)
로마의 일인자들(8)
  • 김도원(金途遠)
  • 승인 2019.06.1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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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냐? 옥타비우스냐? 카이사르 두 번째 주사위를 던지다'

브루투스냐? 옥타비우스냐?, 카이사르 두 번째 주사위를 던지다

화파의 병사들을 먹일 엄청난 양의 양식과 라비에누스의 기병대가 겨우내 먹일 말 먹이가 보관된 아테구아(코르도바 인근에 있는 작은 도시)는 카이사르의 은밀한 공격에 허를 찔렸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코르두바(지명은 코르도바,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주의 주도이다.)에서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지만 이때는 이미 카이사르가 아테구아를 알레시아 공성전(B.C 529월 로마와 갈리아부족연합 사이에 벌어진 전투. 5만 명의 로마군이 8만 명의 베르킹게토릭스의 농성군과 26만여 명의 갈리아 포위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카이사르는 7년간의 갈리아 원정을 종결하고 갈리아 전역을 복속하게 된다. 알레시아는 현재 프랑스 중부 디종과 오를레앙을 잇는 선상에 있는 구릉지대다.) 때처럼 방벽으로 두른 후였다. 아테구아는 용맹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함락되었다. 이제 라비에누스의 풍부했던 말먹이는 카이사르가 총애해 마지않는 갈리아 기병대의 훌륭한 말 먹이가 될 터였다. 공화파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라비에누스는 말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군대를 연안 근처로 이동시켜야 했고, 히스파니아 주민들은 공화파에 대한 신뢰를 접기 시작했다. 히스파니아 탈영병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기원전 451월 초, 달력상 날짜와 계절이 정확히 일치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기원전 453월의 초순,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한 노예로부터 히스파니아인 군관과 병사들이 자꾸 탈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단 그는 탈영을 시도했던 자들을 하룻밤 동안 잡아두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그들을 그냥 풀어주었다. “싸울 의지가 없다면 굳이 잡아두어 무엇을 하겠는가?” 그의 자신감은 추락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의에 헌신하는 자들이 너무 적어.” 나이우스가 동생 섹스투스에게 말했다. “지구상에 카이사르를 물리칠 천재는 없어. 그리고 난 지쳤어.” 나이우스는 손을 뻗어 섹스투스에게 작은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카이사르가 새벽에 보내온 편지였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보좌관 일동, 그리고 공화파 군대병사들에게. 더 이상 카이사르의 관용은 없다. 이 편지는 여러분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기 위한 것이다. 사면은 더 이상 없으며, 내게 한 번도 사면을 받은 적이 없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히스파니아 병사들 역시 같은 죄를 지었으니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다. 공화파의 대의에 동조한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도시에서 싸울 수 있는 연령의 남자들은 모두 발견 즉시 처형될 것이다.

“카이사르가 엄청 화가 났나봐! , 가이우스 형, 장난삼아 벌집을 걷어찬 것 같은 기분이야! 카이사르가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났지? ?” 섹스투스가 나이우스에게 낮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카이사르는 정말 무척 화가 나 있었다.(기원전 51, 지속되는 갈리아의 저항에 마침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카이사르는 함락한 장발의 갈리아 욱셀로두눔에서 갈리아인 4천 명의 손목을 자르고 그들이 갈리아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돌며 구걸하게 한 전력이 있었다.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면 더 이상 카이사르에게 자비는 없었다.) 카이사르의 화는 어쩌면 세르빌리아에게서 받은 한 통의 편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은 편지 속의 키케로 때문이었고 그가 집필한 ‘카토’ 때문이었다. 키케로에 따르면 카토는 로마 역사상 가장 고귀한 로마인이자 이젠 껍데기만 남은 공화국의 가장 충직하고 지조 있는 충복이었고, 카이사르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폭군의 적이요 모스 마이오룸의 흔들림 없는 수호자였으며,.... 육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았고 마지막까지 진정한 스토아주의자였다. 키케로는 선을 넘었다. 넘어도 한참을 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화는 이 때문이었다. 책은 모든 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의 지고한 미덕과 독재관 카이사르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악덕을 선명하게 대조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 분노가 식지 않았으나 카이사르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키케로의 ‘카토’에 대한 반박문을 쓰기 시작했다. 키케로의 주장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논리를 완전히 뒤엎을 참이었다. 키케로가 이 산문을 읽으면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 부끄러워지리라. ‘카토’는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될 작품이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카이사르를 그 어떤 그리스 폭군보다 더한 악한으로 여기게 될 터였다.

나이우스는 전조를 느꼈다. “내가 전쟁터에서 쓰러지거나 뭔가 다른 난관에 처하면 네가 스크리보니아(스크리보니아는 섹스투스의 형인 나이우스의 아내였다.)와 결혼해 줘.” 섹스투스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형의 간절한 눈빛을 보곤 애정과 슬픔이 밀려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전조는 계속되었고 공화파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투를 상의하러 간 자리에서 라비에누스는 이제 앞으로 전투지휘를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내게는 카이사르의 운이 없네.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확실히 깨달았어. 내가 전략을 짤 때마다 우린 늘 패배했지. 그러니 이젠 자네 차례일세,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나는 기병대를 맡아서 무조건 자네의 명령을 따르겠네.”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장남은 머리가 희끗희끗 세어가는 라비에누스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닳고 닳은 전장의 독수리까지 저런 말을 하는데 이젠 정말 어떻게 될까? 라비에누스는 이 모든 게 카이사르의 운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나이우스가 보기에 이것은 운이 아닌 능력의 문제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보낸 최후 통첩문은 공화파의 병사들에게 오히려 결사항전의 의지를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전투에서 져도 죽고, 항복해도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라비에누스는 이러한 병사들의 공포심을 역으로 이용했다.(전쟁의 천재인, -특히 심리전에서도- 카이사르가 왜 이런 편지를 나이우스에게 보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만큼 카이사르의 분노가 컸던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공화파 병사들에게 그의 공포를 확인시킴으로써 전투의지를 꺾으려했던 것인지. 여튼, 전투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한 푼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로마인이 로마인을 학살했다고 카이사르의 무자비를 비판했다. 그의 죽음은 어쩌면 여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싸우기 직전에 병사들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게.” 어깨를 쭉 펴며 라비에누스가 나이우스에게 말했다. “내일 전투를 개시하기 좋은 터를 찾아보세. 결사 항전하는 거야. 이번 싸움을 카이사르가 치러본 가장 힘든 전투로 만들어주겠어.” 문다에서의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하루 전날이었다.

다음 날인 기원전 45317, 문다(스페인 남부 코르두바 동쪽에 있는 들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병력은 8개 군단 48천여 명의 보병과 기병 8천여 명이었고, 나이우스 측은 15개 군단 9만여 명의 보병과 기병 6천여 명이었다.)은 동이 트고 곧바로 교전을 시작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냉혹하고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혈투였다. 문다에서는 영리하고 획기적인 전술 따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카이사르가 지금까지 겪어본 가장 직접적인 전투였으며, 거의 질 뻔한 전투이기도 했다. 공화파는 카이사르로부터 전투에서 자비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전투가 끝난 뒤에도 관용은 없으리라는 공식 통보를 받은 터였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여덟 시간이 넘게 지났지만 전투는 계속됐다. 발부리(굽이 갈라지지 않은 카이사르의 말)에 올라타 전투를 지켜보던 카이사르는 최전방이 흔들리며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을 보았다. 그는 곧바로 발부리에서 내려 방패와 검을 들고 사병들 사이를 헤치며 최전방으로 다가갔다. 10군단의 전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틈만 나면 항명을 일삼는 이 개새끼들아, 적들은 고작 어린애들이다.” 카이사르는 주변의 병사들을 마구 때리며 악을 썼다. “너희들이 계속 이렇게밖에 못하면 너희나 나나 오늘이 인생 끝장나는 날이다! 나도 너희와 함께 죽을 테니까!10군단은 그에게 화답했다. 대열의 간격을 좁히고 자기들 한가운데 서 있는 카이사르와 함께 계속 싸웠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에도 전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퀸투스 페디우스의 기병대가 나설 차례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둔덕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병대는 나이우스의 우측을 공격했다. 젊은 군관 살비디에누스 루푸스가 그들을 이끌었다. 게르만족 천 명이 증원된 갈리아인 기병들이 라비에누스의 기병대에 달려들고 측면을 에워싼 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군대의 후방을 쳤다.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공화파 군대와 히스파니아 동맹군의 시신 3만 구가 문다의 들판을 가득 채웠다. 카이사르의 10군단도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지난 항명을 속죄한 것이었다.(기록에 따르면 실제 카이사르의 손실은 병사 1천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훗날 카이사르는 이에 대해 “이전까지는 승리를 위해 전투를 벌였지만, 문다에서는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고 회고했다.) 오랫동안 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싸웠으나 먼 히스파니아에서는 적으로 마주쳤던 늙은 독수리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도 전사했다. 내전의 중심에 있던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 폼페이우스 형제는 달아났다.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장남 나이우스는 히스팔리스(스페인 남부 도시. 현 세비야)로 피해 은신처를 찾던 중 그를 뒤쫓아 온 카이센니우스 렌토의 손에 죽었다. 카이사르의 하급보좌관인 카이센니우스 렌토는 나이우스의 목을 베어 시장 한복판에 전시했다. 남은 공화파를 소탕하던 가이우스 디디우스가 나이우스의 머리를 발견하고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디디우스는 카이사르가 이러한 야만적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카이센니우스 렌토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곧장 카이사르의 눈 밖에 날 터였다. 섹스투스는 말을 타고 코르두바로 달아났다. 히스파니아인들이 공화파를 택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사람들 눈을 피해 다녀야했다. 코르두바 성문 밖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해방노예 필리포스를 만난 섹스투스는 그의 도움으로 이전엔 형 나이우스의 연인이었으나 곧 자신의 아내가 될 스크리보니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점령군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달려 아버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오래된 영지인 가까운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코르두바에서 수백 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이베루스 강(에브로 강. 스페인 북쪽 프랑스와의 국경 근처에 있다.)을 건너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다음 행선지는 아버지가 수년간 말을 맡겨두었던 라케타니족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섹스투스와 스크리보니아는 당분간 거기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떠나고 나면 그는 발레아레스제도(지중해 서부, 스페인 동쪽 바다에 있는 섬들)에서 가장 큰 섬 마요르로 가서 나이우스의 함대들을 찾아 제독이 되고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할 터였다.

문다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카이사르의 군대는 바람같이 공화파의 근거지인 코르두바로 향했다. 코루두바는 성문을 닫아걸고 저항했다. 하지만 이내 내부로부터 동요가 일어났고, 스스로 문을 열어젖히며 유명한 카이사르의 자비로운 관용이 자신들에게도 해당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관용은 없었다. 카이사르는 입영 가능 연령대의 남자를 전부 불러 모아 즉결 처형했다.(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자가 22천여 명에 달했다.) 코르두바 시에도 우티카(아프리카 카르타고 제2의 도시. 카토에게 협조했고, 카이사르와의 전투에서 패한 카토는 이곳에서 자결했다.) 못지않게 무거운 벌금을 물리는 것은 카이사르에게 당연한 조치였다.

콜린 매컬로가 직접 그린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유언장의 제 1상속자였던 그는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기원전 27년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콜린 매컬로가 직접 그린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유언장의 제 1상속자였던 그는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기원전 27년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5년까지 장장 5년여를 끌어오던 카이사르와 공화파의 내전은 문다전투로 사실상 끝이 났다. 이제 로마로 돌아가면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 될 터였다. 그리고 동방의 파르티아 원정에 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겼다고 이긴 게 아니다. 오늘 문다와 코르두바에서 죽인 병사들은 대부분 동포 로마인들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아버지이거나, 형제이거나, 남편이다. 이제 나는 로마에 돌아가더라도 고개를 들 수 없게 됐다.(그의 생각처럼 그가 로마로 돌아갔을 때 로마의 반응은 싸늘했다.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는 당시 로마의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 “로마 시민들은 어느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죽인 것은 외국의 장군이나 왕이 아니라 로마의 명문 귀족이나 평범한 집안의 아들과 가족들이었다.)

카이사르의 불행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로마로 돌아오는 내내 그가 모르는 사이에 싹트고 있었다. 코르두바에서부터 카이사르와 동행하고 있던 어렸지만 현명한 옥타비우스도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싹들은 카이사르로부터의 신뢰가 아예 없어졌거나 없어지리라 예측하는 자들, 아직 취해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카이사르에 의해 취해질지도 모를 인사를 속단하며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가 그 싹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임을 농담 삼아 ‘카이사르 살해 모임’이라 불렀다. 데키무스 투룰리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및 카이킬리우스 부키올라누스 형제, 푸불리우스 및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 형제,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참수한, 그리고 지금 화가 잔뜩 나 있는 카이센니우스 렌토 또한 모임의 고려대상 인물들이었다. 지금은 카이사르로부터 총애 받고 있지만 그 사실이 언제 바뀔지 몰라 불안해하는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키우스는 바실루스가 추천했지만 트레보니우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그를 대상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몇 년 전 카이사르를 살해하려하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곧 그 의중을 떠볼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는 수락하리라.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안토니우스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 카이사르는 자신의 수습군관의 소개로 만난 수습군관과 같은 열일곱 살의 마르쿠스 아그리파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두려움을 모르고 강건한 체력에 굉장히 똑똑한 젊은이, 충직한 일꾼,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안타까웠다. 옥타비우스는 아그리파를 경애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넌 마르쿠스 아그리파를 무척 좋아하지.” 카이사르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보다 좋습니다.” 옥타비우스가 단박에 대답했다. 종기의 고름을 짜내는 칼질은 깊고 가차없어야 했다. “넌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어, 옥타비우스.” 옥타비우스는 깜짝 놀랐고, 이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빨리 나이가 들어서 이런 외모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카이사르.”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전혀 바뀌지 않을 거다. 너는 앞으로도 죽 지금 같은 외모를 유지할 거야. 아주 예쁘장하고 다소 가냘픈.”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의 아름다운 외모가 걱정이었다. “연정을 품은 게 아니라면 그렇게 넋 놓고 바라보는 행동은 그만둬라. 그리고 결코 그런 마음이 싹트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단속해라.” 카이사르는 오래전 비티니아 니코메데스 왕과 자신에 얽힌 비방과 중상모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의 충고니까 잘 새겨들어야 해.”라고 말하면서.

카이사르는 잡았던 옥타비우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마르쿠스 아그리파를 그렇게 대놓고 경애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은 그만두렴. 네가 그러는 이유를 나는 알지만 남들은 그렇게 관찰력이 뛰어나지 않으니까. 아그리파와 우정을 키워가거라. 하지만 늘 약간의 거리를 둬야 해. 그와 우정을 키워가라는 이유는 아그리파가 너와 동갑이고 언젠가 그 같은 추종자들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야. 그는 장래성이 아주 밝아 보여. 네가 아그리파의 경력에 도움을 준다면 그는 네게 온전히 충성할 거야. 아그리파는 그런 종류의 사내니까. 내가 그와 거리를 약간 두라는 이유는, 그가 너와 동등한 지위의 친구라는 인식을 결코 그에게 심어주면 안 되기 때문이야. 그를 아이네아스(그리스에서 건너간 로마의 시조.)의 충직한 친구 아카테스(아이아네스가 가장 믿고 신뢰했던 동료이자 친구. 사람들은 ‘믿음직한, 충직한, 마음 놓을 수 있는’이라는 뜻의 라틴어 피두스(Fidus)를 이름 앞에 붙여 그를 ‘피두스 아카테스(fidus Achates)’라 불렀다.)로 만들어라. 너는 베누스와 마르스의 피를 타고난 반면, 아그리파는 오스카의 메사피족인데다 혈통 없는 가문 출신이 아니냐. 남자라면 누구나 위대한 인물이 되어 위대한 과업을 성취하는 꿈을 꿀 수 있어야 해. 그리고 나는 그런 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실현시킬 수 있는 로마를 만들 거야. 하지만 나나 너 같은 사람들은 고귀한 태생을 덤으로 선물받았고, 그만큼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 우리는 새로운 가문을 개척하기보다 우리 조상들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단다.” 이것이 정치와 우정, 그리고 혈통과 고귀한 신분에 대한 카이사르의 생각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옥타비우스를 후계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었다. 현명했지만 아직은 어린 옥티비우스는 이런 카이사르의 속내를 몰랐으나 결국은 알게 될 터였다. “이렇게 늦게야 카이사르와 친해지다니 너무해. 내가 어릴 때부터 이처럼 이 분과 가깝게 지냈다면 천식을 아예 앓지 않았을지도 몰라.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은 무한해. 나는 이 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야.” 옥타비우스는 카이사르의 친절함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존경으로 화답했다.

7월의 셋째 날 마침내 카이사르 일행은 나르보(지중해 연안의 프랑스 남부에 있는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10군단의 잔존 병사들과 이전보다 수가 늘어난 종달새5군단도 함께 했다. 마중을 나온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사죄를 청하며, 용서를 구했다. “사죄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내리겠네, 안토니우스.” 카이사르가 흔쾌히 대답했다. 안토니우스는 독재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로마에서 온 원로원 의원이 예순두 명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호리호리한 청년에게 연신 시선을 빼앗겼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친척인 이 청년을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저 훗날 가문에 불명예를 안길 동성애자 청년으로만 생각해 왔던 것이다. 물론 변함없이 여자처럼 예쁘장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카이사르에게 촉망받는 수습군관이라는 자신감을 조용히 발산하고 있었다. “아까 보니 그 여장남자 같은 옥타비우스를 몹시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카이사르와 함께 실내로 들어온 안토니우스가 불쑥 말했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게, 안토니우스. 옥타비우스를 머리 짧은 무희舞姬쯤으로 봐선 곤란해. 옥타비우스의 새끼손가락 하나에 든 정치 감각이 자네의 그 거대한 몸 전체에 든 것보다 많아. 문다전투 후 줄곧 같이 다녔는데, 젊은이와 같이 있던 게 그렇게 즐거웠던 적이 없었네. 몸이 병약하니 무관은 못 되겠지만 두뇌 회전이 빠르고 슬기로워.” 안토니우스는 깜짝 놀랐다. 가슴에 비수가 꽂힌 기분이었다.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녀석을 입양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주실 생각이십니까?” 안토니우스가 물었다. “애석하지만 그렇지 않아. 아까 말했지 않나. 그앤 병약해. 오래 살지 못할 걸세.” 카이사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저한테 잘해주십시오, 카이사르. 그럼 저도 잘해드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내가 자네 사죄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아직 자넨 근신 기간이야. 그 사실을 잘 기억해 두게. 빚은 다 해결되었나?” 안토니우스의 막대한 빚에 대해서는 온 로마가 다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에게 내년 집정관을 지낸 다음 다누비우스 강(다뉴브 강) 유역과 다키아(현재 루마니아 영토)에서 흑해에 이르는 땅을 정복하러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안토니우스가 전리품도 적고, 그것마저도 바티니우스와 나누어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하자, “안토니우스 자네는 숙제 안 하고 놀다가 산수도 못 깨친 로마 소년의 전형이로군, 욕심은 또 어찌나 많은지.” 카이사르가 조롱하듯 안토니우스를 쳐다봤다.

카이사르는 나르보에서 두 주간 머물렀다. 그동안 신규 속주 나르보 갈리아를 정돈하고 얼마 되지 않는 10군단 잔존 병사들에게 비옥한 토지를 넉넉히 분배해주었다. 종달새5군단은 카이사르를 따라 동진해 로다누스 강(스위스와 프랑스에 걸친 강. 현재 이름은 론 강이다.) 유역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종달새5군단 병사들도 똑같이 좋은 땅에 정착시키는 것이 카이사르의 생각이었다. 이 비길 데 없는 무적의 군단병들은 갈리아에 있어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이들은 장차 갈리아 여자들과 결혼함으로써 뛰어난 두 전사 민족의 피를 결합할 터였다.

“전에도 왕처럼 보였지.” 아첨하는 원로원 의원들 사이로 거니는 카이사르를 바라보며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어. 카이사르 렉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왕이 되려한다는 확신을 로마의 주요 인사들에게 심어준다면 우리는 분명 무사할 걸세, 데키무스. 로마는 참주僭主(tyrannos.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비합법적으로 독재권을 확립한 지배자.)를 시해한 자를 처벌하지 않아.” 그들은 안토니우스를 그 일을 맡을 적임자로 골랐다. 나르보에서 보낸 마지막 날 트레보니우스는 마침내 안토니우스와 이야기하는데 성공했다. 몸집이 큰 멋진 말을 보여주겠다는 트레보니우스의 미끼를 안토니우스가 덥석 물었다. 트레보니우스는 “어쨌든 올해 남은 기간과 내년에 집정관을 맡기로 한 자네야말로 카이사르가 카이사르 렉스가 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작은 계획들을 실행할 적임자.”라며 카이사르가 죽어야 모든 게 달라진다고 머리가 컸지만 그보다는 탐욕이 더 큰 안토니우스를 꼬드겼다. 트레보니우스는 허리를 숙여 장화 끈을 매는 안토니우스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내 말이 먹히고 있어.” 하지만 안토니우스 역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거대한 마차 행렬이 나르보를 출발해 사흘 후 아렐라테(프랑스 남동부, 부슈뒤론주 서부의 관광 도시. 론 강 하류 왼쪽 연안 낮은 대지에 있다.)에 도착했다. 데키무스는 마차에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에게 고자질했을까 걱정했으나 위인은 고자질보다는 자기의 역할을 더 기쁘게 여겨 입을 다물었다. 카이사르는 거기서 일주일간 머무르며 종달새5군단의 정착 업무를 살폈다. 그리곤 갈리아 속주의 수도, 총독의 관저가 있는 플라켄티아(지명은 피아첸차.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에 있는 도시.)로 향했다. 플라켄티아에는 카이사르의 충성스러운 피호민인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가 총독으로 있었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그를 보러 온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 “브루투스 투스쿨룸(키케로의 별장이 있던 로마 근교의 지명.)에 있다는 원고 이야기를 듣고 싶군.” “네, 하나는 덕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적 인내심에 관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의무에 관한 것입니다.” “덕에 관한 자네의 견해는 무엇인가, 브루투스?” “아, 덕은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을 보장합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가난이나 질병이나 추방을 겪어도 결코 불행해지지 않지요, 카이사르.” “그럴 리가! 그간 자네가 겪은 숱한 경험을 들어보건대 실로 놀라운 발언이로군. 과연 스토아주의자의 주장다워. 순종적 인내심, 그건 미덕인가?” 카이사르는 이렇게 묻더니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절대 아니지!” 칼비누스가 웃었다. “응당 카이사르다운 대답이군요.” “응당 남자다운 대답이지요.” 멀리 있는 의자 끝에서 한 목소리가 말했다. “인내심은 참된 미덕이지만, 순종은 오로지 여자에게만 바람직한 덕목입니다.” 옥타비우스가 단언했다. 한마디 하려던 카시우스는 충동을 억눌렀다. 그를 자제시킨 것은 카이사르의 표정이었다. 세상에, 우리 지배자께서는 저 멍청한 팬지꽃을 자랑스레 여기시는군! 게다가 저놈 의견을 존중하기까지!

저녁식사 자리가 끝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에게 각각 수도담당 법무관 자리와 외인 담당 법무관 자리를 제안받았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네 물론입니다!” 브루투스가 밝은 얼굴로 소리쳤다. “네, 좋습니다.” 브루투스보다는 덜 기쁜 목소리로 카시우스가 말했다. 카이사르는 왜 그 자리가 그들에게 적합한지 말해주는 것으로 그의 제안을 마쳤다. 카시우스는 느릿하게 뒤로 누우며 생각했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어. 브루투스는 날아갈 듯한 행복감에 젖었다. 수도담당 법무관! 가장 높은 자리. 크림이 가득한 호수 속의 두 마리 고양이들 같군, 하고 옥타비우스는 생각했다.

플라켄티아를 떠날 땐 카이사르 혼자 이동했다. 옥타비우스에게조차 로마까지 알아서 가라고 했다. 아이밀리우스 가도를 타고 해안을 지나 에투루리아의 아우렐리우스 가도를 질주하는 작은 이륜마차에는 카이사르의 비서들과 하인들, 그리고 합데파네만이 타고 있었다. 8월이 되고도 한참이 지났다. 거리낌없이 떳떳한 전쟁을 치르러 시리아로 출발하기까지 일곱 달도 남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카이사르는 로마와 이탈리아를 정비하고, 15개 보병 군단과 게르만족과 갈리아인과 갈라티아인(터키의 소아시아 또는 아나톨리아의 북중부에 주로 거주했던 갈리아인)으로 구성된 기병 1만 명이 동원될 5년짜리 원정을 준비해야 했다. 카이사르의 머리속은 이를 위한 생각들로 가득 찼다. 도로를 달리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비서들에게 동시에 해결해야 할 여러 내용들을 구술했다. 군사 문제, 운하와 도로에 관한 문제, 퇴역병들의 정착에 대한 문제, 이탈리아 갈리아의 로마시민권에 관한 문제, 알렉산드리아에는 있으나(그것도 무려 100만 권의 책을 소장한) 로마에는 없는 공공도서관의 문제까지. 이것은 카이사르가 해야 할 일들이었고, 그만이 잘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비서들에게 구술하지 않은 주제가 하나 있었다. 그의 부재중에 로마의 운명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바로 상속자, 후계자에 대한 문제였다. 그가 독재관이 되고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로마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로마를 비워야 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카이사르는 그동안 사실상 모든 일을 혼자 해 왔었고, 이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카이사르는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로마에는 자기도 카이사르와 똑같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곱 달이 지나면 파르티아로 가야했다. 파르티아는 서방세계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만이 오로지 파르티아 왕국을 침략해 멸망시킴으로써 그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는 자만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기량과 능력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마에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달리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카이사르는 처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파르티아에 데려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본능적으로 권력을 악용하려는 욕구를 지닌 자였다. 군단들을 데리고 카이사르가 없는(그때 카이사르는 위대한 폼페이우스와 내전 중으로 이집트에 있었다.) 로마에서 로마의 일인자 독재관이 되려고 말썽을 일으킨 전력도 있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 안토니우스가 항명하지 않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안토니우스를 파르티아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이 말은 안토니우스에게 집정관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집정관이 된 안토니우스를 통제할 방법은 따로 마련하면 될 터였고, 이미 그의 머리속에 방법은 그려져 있었다. 동방에 가기 전까지는 카이사르가 수석집정관을 맡고, 그가 동방에 간 후에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그가 수석집정관이 될 것이었다. 돌라벨라는 그 일을 몹시 즐거워할 인물이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아직 히스파니아에 있지만 카리나스가 대적하고 있고, 섹스투스가 순순히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리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래도 양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속주에 강력한 총독들을 배치할 필요는 있었다. 카이사르가 신뢰할 수 있는 동시에 안토니우스를 싫어하는 자들로. 이것이 안토니우스를 통제할 카이사르의 방법들이었다. 그런데 누가, 누가, 누가? 누가 카이사르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

콜린 매컬로가 연필로 직접 그린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브루투스를 제 2상속자로 올렸으나, 그가 '카이사르 살해 모임'의 핵심멤버라는 것은 죽을때까지 알지 못했다.
콜린 매컬로가 연필로 직접 그린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브루투스를 제 2상속자로 올렸으나, 그가 '카이사르 살해 모임'의 핵심멤버라는 것은 죽을때까지 알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나르보 총독 관저의 정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낯익은 얼굴을 본 순간 한때 후계자로 생각하긴 한 적이 있는 안토니우스에 관한 모든 고려를 접었다. 석양에 비친 안토니우스를 본 순간 카이사르는 그의 내면이 썩어 있음을, 도덕성이 무너지고 감정이 메말랐음을 보여주는 끔찍한 징후들을 목격했다. 사치스러운 생활에 너무 탐닉하며 지낸 탓이리라. 줄곧 빚에 시달려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모자란 상식과 야수적인 야망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했다. 다른 한 명, 퀸투스 페디우스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언제까지나 캄파니아(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주. 주도는 나폴리이다.)인 기사로만 남을 터였다. 최종 후보는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이 두 사람으로 압축되었다.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친아들 카이사리온은 염두에 없었다. 카이사르에게 그는 로마인이 아닌 이집트인, 파라오가 될 아들이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인생의 절정기에 있었고(기원전 84, 혹은 기원전 81년생. 어린 시절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후계자 중의 하나로 정할 때가 기원전 45년쯤이니 이때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나이는 마흔이 되지 않았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잘못된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장발의 갈리아에서 육상전이든 해상전이든 항상 눈부시게 지휘했고, 살인 법정에서도 법무관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카이사르는 딱 한 차례 그를 나무란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장발의 갈리아를 통치하던 시절 벨로바키아족의 봉기에서 데키무스가 보인 잔혹한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데키무스가 카이사르에게 설명하길, 벨로바키아족은 카이사르가 떠난 뒤에도 군사를 유지한 유일한 부족이었을뿐더러 차기 총독이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카이사르만큼 결단력이 있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했다. 카이사르는 이 설명을 받아들였다. 카이사르는 데키무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7개월 후, 기원전 44315,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회랑 앞에서 단검으로 자신을 찌르는 14명의 암살자 중 하나가 데키무스 브루투스인 것을 알았으나, 그가 그 일을 주도한 ‘카이사르 암살 모임’의 핵심 멤버라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알지 못했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9월 말경 열여덟 살이 될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 청년을 몹시 사랑했다. 하지만 옥타비우스는 너무 어리고 병약했다. 합데파네는 옥타비우스가 카이사르와 함께 있으면 안정감을 느껴 천식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우스 세계의 일부로 남아있는 한 옥타비우스는 건강하겠지만, 카이사르의 상속자는 그의 사후에 유산을 받는다. 카이사르의 상속자 곁에는 카이사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갈리아 최고의 드루이드 카트바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카이사르는 죽을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카트바드는 카이사르가 괴팍한 노인이 될 정도로 오래 살지 못하며 인생의 절정기에 죽으리라 예언했다. 카이사르는 쉰다섯 살이 되었으니 인생의 절정기는 이제 10년 남짓 남았다.

카이사르는 눈을 감고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데키무스 브루투스, 금발에 새하얀 피부로 담백한 인상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빛에 굳은 의지와 지력이 엿보이고 입매가 굳고 강인하며 얼굴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진다. 감점 요인은 모친에게서 이어받은 성적性的 방종 기질이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닮은 얼굴. 살짝 여성스럽고 다소 지나치게 우아하며, 삐죽 튀어나온 귀를 가려주기엔 역부족인 긴 머리칼. 하지만 눈을 들여다보면 비범하고 영민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입매와 턱선은 강인하고 단단하다. 감점 요인은 천식이다.

카이사르, 카이사르, 어서 결정을 내려! 루키우스가 뭐라고 했었지? 카이사르의 행운은 카이사르의 이름과 함께 간다고, 그러니 카이사르가 믿어야 할 것은 오로지 카이사르의 행운뿐이라고 했다. “주사위를 높이 던져라!(ανερρίφθω κύβος! 에네리힉소오 키보오즈)” 카이사르는 그리스어로 외쳤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살면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로 그렇게 말한 것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다.(拙稿, ‘주사위를 높이 던져라!’ 참조) 카이사르는 종이 한 장을 끌어당겨 갈대 펜에 잉크를 적시고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유언장은 그가 죽기 전까지 누구도 볼 수 없을 터였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도. 그리고 유언장을 볼 수 없었던 그들 중 한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중해와 세상의 지배자이면서 신격을 갖춘 신보다 겨우 한 뼘 아래의 장군, 카이사르 암살자가 될 것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가 될 것이었다.

※위 글은 콜린 매컬로의 「Masrers of Rome . The October Horse2. 7장 균열의 시작(93p~210p). 기원전 46년 인테르칼라리스(윤달)부터 기원전 459월까지.」를 읽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사건 및 지명에 주를 넣고, 약간의 내 생각을 첨가해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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