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일인자들(7)
로마의 일인자들(7)
  • 김도원(金途遠)
  • 승인 2019.06.0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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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우스, 정부에는 반드시 반대세력이 있어야 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시대 동방의 지도. 출처 네이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시대 동방의 지도. 출처 네이버.

마티우스, 정부에는 반드시 반대세력이 있어야 해!”

은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보니들과의 내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를 떠난 카이사르는 소아시아로 갔다. 예전 술라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카이사르는 동방을 평정해야 했다. 긴 행군을 거쳐 젤라(지명은 질레 Zile, 터키의 중북부 토카트주에 있는 도시)에서 킴메리아(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일부)의 왕 파르나케스(파르나케스 2,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로 공화정 말기인 B.C 47년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가 카이사르에게 패했다.)와 치룬 전쟁은 네 시간 만에 끝이 났다. 파르나케스의 10만 명의 전사들은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보다 잘 싸웠지만(B.C 4889일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파르살로스에서 벌어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전투.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완벽하게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주도권을 잡았고, 폼페이우스는 결국 괴멸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유능한 킬리키아(소아시아의 남쪽, 키프로스의 북쪽 해안) 2개 군단과 타르소스(터키 남부 이첼주의 주도)에서 온 6군단, 그리고 게르만족 기병대는 그보다 더 잘 싸웠다. 파르나케스는 달아났다. 전쟁 자금과 보물들을 그러모아 전속력으로 북쪽을 향해 달렸다. 하렘의 여자들은 죽인 후 버려두고 갔다. 그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오직 하렘의 여자들을 위해서만 유감스러워 했다. 카이사르는 보좌관과 군관, 백인대장, 보병과 기병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고 장군 몫은 받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미 동방으로 오면서 왕들에게 선물 받은 충분한 수의 금으로 된 왕관이 있었다. 사병들은 1만세스테르티우스(로마시대 통용되던 황동화로 1세스테르티우스의 무게는 황동 25~28g이다. 처음에는 은 1.2g의 은화로 주조되었으나, B.C 23년 아우구스투스가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황동화로 바꾸었다. 1/4데나리우스의 가치가 있다. 데나리우스는 은화로 은 4.5g이 사용되었다. 당시 군단병의 연봉이 900세스테르티우스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와 같은 보좌진은 100탈렌툼(금화, 50파운드가 1탈렌툼이다.)씩 재산이 늘어났다. 킴메리아의 진지 주변이 이 정도니 파르나케스가 챙겨간 재물을 얼마나 될까?  

이틀 후 카이사르는 페르가몬(현재 터키 이즈미르주 베르가마 부근)으로 진군했다.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의 아들 아르켈라오스와 독대하곤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충분한 선물(기대 이상의 땅과 5년간 징세의 유예)을 주었다. “감사하다는 말로 부족하다.”는 아르켈리오스에게 카이사르는 떠나면서 활기차게 말했다. “내가 받고 싶은 건 감사가 아니오. 더 귀중한 것, ‘충성을 원하오.” 이것이 피호민이 카이사르에게 지켜야 할 의무였다. 다음 행선지는 북쪽의 비티니아(Bythynia. 소아시아 북부 흑해에 접한 지역으로 현재는 터키의 아시아 북부지역이다.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였다.)였다. 프로폰티스 호수의 남쪽과 접한 나라였고, 그 거대한 호수는 흑해의 예고였다. 흑해의 물이 트라키아의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과해 호수를 가득 채웠고 오래된 그리스 도시 비잔티온이 그 해협을 끼고 있었다. 프로폰티스 호수는 헬레스폰트 해협을 따라 남쪽의 에게해로 흘러들어가 사마르티아의 큰 강들과 스키타이의 대초원을 지중해와 이어주었다.

니코메디아(현 터키 이즈미트, 비티니아 왕국의 수도)는 프로폰티스 해협의 좁고 길고 한적한 입구에 있었다. 쉰세 살인 카이사르는 스무 살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곱슬머리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하고 여자 같은 남자 노예들과 온갖 쾌락을 추구했던 여든 살의 늙은 왕 니코메데스 3세와 왕비 오라달티스, 그리고 그가 도착한 날 주인의 엉덩이를 물었던 그녀의 개 술라, 훈훈한 추억으로 가득 찬 니코메디아는 카이사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아마 카이사르가 원하던 전함을 흔쾌히 빌려준 왕의 너그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애인 사이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그들은 이제 모두 죽고 없다. 카이사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그들의 궁전은 총독 관저가 된지 오래였고, 거기에 있던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들은 초대 총독 융쿠스가 모조리 가져가버렸다. 융쿠스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비티니아를 떠났지만 어떤 신이 그에게, 혹은 그의 행위에 분노했다. 그와 그의 부정한 탈취물들은 귀국 도중 지중해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그래서 조각상과 그림들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니코메디아에서 카이사르는 전도유망한 부하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를 비티니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또 다른 전도유망한 남자 마르쿠스 코일리우스 비니키아누스는 폰토스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르나케스가 벌인 참상을 복구하는 것이 그의 임무가 될 터였다. 이 모든 준비를 끝낸 후 카이사르는 서재 문을 걸어 잠그고 편지를 썼다.(카이사르는 편지 쓰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의 편지 덕분에 그와 로마의 역사는 더 풍부하고 세밀해졌다.) 클레오파트라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에게, 로마에 있는 푸불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에게, 카이사르의 기병대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그리고 오랜 친구 가이우스 마티우스에게. 카이사르와 마티우스는 동갑이었다. 카이사르는 방어적인 태도를 모두 내려놓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나머지 수신자들과 달리 오직 그만은 다른 속셈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베니veni, 비디vidi, 비키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 말을 모토로 삼을까 생각중이네. 이 말에 들어맞는 상황이 걸핏하면 생기는데다 간명한 표현이기까지 하니 말이지. ....동방의 문제들은 바로 잡았네. 엉망진창이었어! 탐욕스러운 총독들과 침략을 일삼는 왕들 덕분에 킬리키아와 아시아 속주, 비티니아, 폰토스는 지쳐 신음하고 있어. 시리아에는 동정심을 덜 느껴. 난 독재관 술라(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B.C 138~B.C 78, 로마의 집정관과 독재관을 지냈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네. ....술라의 문제는 정치의 기본도 몰랐다는 거야. 그는 자신의 새 법들이 무효화 될 수 없게 만들어놓지 않은 채로 독재관직에서 물러났지. 장담컨대 카이사르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거야.” 카이사르는 독재관 술라의 전철을 절대로 밟지는 않을 거였다. 술라는 그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 아주 훌륭한 스승이었다. “내 추종자들로만 채워진 원로원은 정말이지 바라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리될 것 같아. 자네는 고분고분한 원로원이 구성되는 게 뭐가 어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가 않아. 마티우스, 정말일세. 건전한 정치적 경쟁이 존재하는 이상 내 추종자 중 거친 자들도 선을 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모든 정부 기관이 내 추종자들로만 꽉 찬다면 젊고 야심찬 누군가가 나를 죽이고 독재관 자리에 앉는 걸 무슨 수로 막겠나?”(몇 년 뒤인 B.C. 443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회랑 앞에서 그가 관용을 베풀며 용서한, 그러나 야심이 없고 그의 부와 채권에만 관심이 있는 젊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그가 아주 총애했던 또 다른 브루투스인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포함된 14명의 귀족들의 단검에 무차별적으로 찔려 목숨을 잃었다. 카이사르는 총 23곳이나 칼에 찔려 쓰러졌고, 그가 쓰러진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적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동상 앞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죽은 후 공개된 유언장에는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에 이어 2번째로 그의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었다. 카이사르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拙稿 ‘3월의 이두스, 거인의 몰락참조) 정부에는 반드시 반대세력이 있어야 해! 없어도 되는 건 보니야. 반대를 위해 반대하고 자기들이 반대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니까.”-, 카이사르여! 어쩌면 그때가 지금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회와 이렇게도 비슷한가? 무엇을 반대하는지도 모르고, 그 반대가 어떠한 결과도 불러올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오직, 당파성과 이념만으로 반대를 일삼는, 원래 정치란 그런 것인가?- 그러니 보니(선량한 자들, 공화파)의 반대란 성실하고 신중한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비이성적이었던 거야. 내가 과거 시제를 쓴 것에 주목하게. 이제 보니는 없어. 아프리카 속주에서도 그걸 알게 되겠지.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올바른 반대였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내전을 해서 실제로 얻은 거라곤 반대의 절멸이지. 난 곤경에 처했어. ....하지만 난 몰라볼 정도로 변했어. 마티우스, 한 사람이 필적할 자가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갈 필요가 없는데, 유감스럽게도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네. 나와 치열하게 경쟁할 만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 푸불리우스 클로디우스, 가이우스 쿠리오, 마르쿠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파로스의 등대가 된 기분이야. 자기의 반만큼 높은 것조차 전혀 없는 등대 말이지.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닌데, 내겐 선택권이 없었어.”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온 후 쉼 없이 자신을 몰아쳐 여기까지 왔으나, 스스로 선택권이 없었다고 마티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정말 그랬을까? 아니다. 모든 것의 뒤에는 카이사르의 존엄이 있었다. “그들은 정말 내가 진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난 카이사르야. 내게 존엄은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카이사르가 근거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고 영구 추방을 당한다?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과거를 되돌린다 해도 난 똑같이 할 거야. 하지만 내 안의 뭔가가 부서졌어. 난 내가 원했던 것이 될 수 없어. 최적기에 선출된 2선 집정관, 최고신관, 원로원의 차기 집정관과 집정관 다음으로 의견을 구하는 원로 정치인, 최고의 군인. 지금 나는 에페소스(터키 이즈미르주에 있는 그리스 고대 도시)의 신이자 이집트의 신이며 로마의 독재관이자 세상의 지배자야.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택한 게 아니야. 자네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만큼 나를 잘 알잖아. 자네 같은 사람은 거의 없어. ....”

카이사르는 편지쓰기를 마쳤다. 9월쯤 카이사르는 로마에 있을 예정이었다. 카이사르는 젤라에서의 전투 뒤에 킴메리아의 아산드로스에게 아산드로스의 부친이 시노페(흑해 연안의 고대 교역항구)로 달아났으며, 고국으로 돌아가는 중인 듯하다고 편지를 썼는데, 카이사르가 니코메디아를 떠나기 직전에 그 답장이 왔다. 편지에는 배려에 감사하며, 킴메리아에 도착한 파르나케스가 처형되었음을 알릴 수 있어 기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산드로스는 이제 킴메리아의 왕이자 카이사르의 가장 열렬한 피호민이 되고자 했다. 그는 신의의 증거로 금 2천탈렌툼을 보내왔다. 헬레스폰트 해협을 통과하는 카이사르의 배에는 7천탈렌툼의 금과 수많은 왕관이 실려 있었다. 카이사르는 첫 번째 경유지 사모스 섬에서 그에게 신관 직을 약속하며, 브루투스(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이사르의 정부情婦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할때 카이사르 암살자 모임에 가담했다.)를 떠나보냈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가 신관 관련 법절차의 권위자였기 때문에 브루투스는 그곳에서 그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했다. 가이우스 카시우스를 계속 데리고 가야하는 것은 아쉬운 점이었다. 카이사르는 사모스에서 레스보스를 거쳐 폼페이우스를 열렬히 지지했던 아테네에 들러 아테네에 막대한 벌금을 부과한 후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소스를 나누는 지협의 코린토스를 여행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래전 가이우스 뭄미우스에게 약탈당한 뒤로 코린토스는 절대 회복되지 못했다. 로마로 돌아가면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진급시킬 생각이었다. “내가 관대한 사람이라는 걸 신들께 감사해야 할 때 내게 화를 내는 짓은 그만두게. 내가 술라였다면 자넨 이미 죽었어, 카시우스. 방향을 잘못 잡은 자네의 기운을 올바른 쪽으로 돌려 로마에 유용한 사람이 되게. 나도, 자네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로마라네.” “이번에 태어난 당신 아들의 목숨을 걸고, 로마의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맹세하네.” 카이사르가 대답했다. “로마의 왕? 나는 곧 사해 위의 동굴에 사는 미친 은둔자 중 하나가 될 걸세.”

카이사르가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생일(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B.C. 106929일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에 이탈리아 땅을 밟을 때 그의 동행은 데키무스 카르풀레누스와 1개 백인대 뿐이었다. 계획대로 브룬디시움에 상륙했더라면 키케로를 만나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성가신 바람은 이탈리아반도의 발꿈치 부근에서 타렌툼으로 불어왔고 일이 틀어졌다. 카이사르는 일행에게 아피우스가도로 계속 가라고 지시한 후 혼자 이륜마차를 타고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조만간 그는 전직 집정관이었으며, 뛰어난 법률가이자 웅변가, 그러나 그의 반대편에 섰던 마르쿠스 키케로를 만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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